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상하이 사변 (문단 편집) === 일본군의 2차 증원 === 중국군의 분전으로 전황이 지지부진하자 2월 23일의 각의는 육군대신 아라키 사다오 등의 주장으로 2개 사단의 증파를 결정했다. 2월 24일 1사단과 14사단을 증파하고 전 관동군 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을 사령관으로 삼아 상하이 파견군 사령부을 창설했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상하이에서의 고전에 열불받친 일본 측이 눈이 뒤집혀서 앞뒤 안가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이러한 파병은 사실 치밀한 계산이 밑에 깔린 것이었다. 파병 결의 이후인 2월 25일 일본육군 참모본부 제2부는 <상해사건대책안>을 책정하여 상하이 사변을 국지적으로 해결한다는 방침을 확정했다. 이 대책안에 따르면 상하이 사건의 목적은 상하이의 군사적 점령이나 이익 확대가 아니라 국지적 해결 방침에 따른 당초의 기도 관철이며 상하이의 일본군 역시 상륙지점에서 일정한 정도의 교두보를 확보한다면 군사 행동을 정지하기로 결정했다. 일본 외무성 역시 군부에 호응하여 국제연맹 사무국장, 주중 공사, 상하이 총영사에게 "우리로서는 시국을 이용하여 상하이 지방에서 정치적 야심을 충족시키려는 의도는 조금도 없다. 따라서 동 지방에서 전관 거류지를 설정한다거나 혹은 일본인만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과 같은 저의가 없음은 물론 오히려 상하이 개발의 공로자인 영국, 미국, 프랑스에 대해 충분한 경의를 표한다. 특히 공동조계 공부국을 존중하여 상하이가 [[국제도시]]다운 면목을 더욱 발휘할 수 있도록 노력하려 생각하고 있는 형편임을 해당국에 설명하라."고 지시했다. 또한 25일과 26일에는 "중국군이 일정 지역 밖으로 일정 기간 내에 철퇴하는 것을 조건으로 전투의 정지를 승락할 의사가 있음을 밝혀도 좋다. (...) 이후 상하이 부근에 있는 외국인의 보호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상하이에 있는 열국 대표자들이 포함된 원탁회의가 개최된다면 이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시했다. 일본 외무성은 소위 '원탁회의'의 개최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었다. 한편 장제스는 일본군이 상하이 북서쪽 유하 방면에 상륙하여 상하이의 중국군을 포위할 것을 염려하여 25일 장광나이에게 다음과 같이 타전했다. >"2차 결전 때를 29일과 3월 1일 양일로 하고 아군 후방부대를 모두 전선에 수송했다. 그밖의 부대는 6일이 지나지 않으면 전투에 참가할 수 없다. 이 며칠 동안은 어떻게든 전선의 병력을 절감하여 부대를 각지에 모으고 유사시에 대비, 총병력의 반 이상을 예비병력으로 보존하라. 특히 유하 방면에는 3개 단의 병력을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 상세한 회답을 기다리겠다. -[[장제스|중정]]" 하지만 장광나이와 차이팅카이는 이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조너선 펜비의 장제스 평전에 따르면, 이는 [[쑨커]]의 소개를 받은 [[가와시마 요시코]]가 차이팅카이에게 일본군은 갑북, 오송 방면으로 상륙할 것이라고 거짓 정보를 제공했기 때문이라 한다. 장제스 역시 장광나이가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것이 가와시마 요시코 때문이라고 주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